비가 -유하 비가 내립니다
그대가 비 오듯 그립습니다
한 방울의 비가 아프게 그대 얼굴입니다
한 방울의 비가 황홀하게 그대 노래입니다
유리창에 방울방울 비가 흩어집니다
그대 유리창에 천갈래 만갈래로 흩어집니다
흩어진 그대 번개 속으로 숨어버립니다
흩어진 그대 천둥 속으로 숨어버립니다
내 눈과 귀, 작달비가 등 떠밀고 간 저 먼 산처럼
멀고 또 멉니다
그리하여 빗속을 젖은 바람으로 휘몰아쳐가도
그대 너무 멀게 있습니다
그대 너무 멀어서 이 세상
물밀듯 비가 내립니다
비가 내립니다
그대가 빗발치게 그립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첫사랑 -김현태
눈을 다 감고도
갈 수 있느냐고
비탈길이 나에게 물었다
나는 답했다
두 발 없이도
아니, 길이 없어도
나 그대에게 갈 수 있다고
즐거운 편지 -황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즘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기억하는가 -최승자
기억하는가
우리가 만났던 그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물 내리던 그날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을 뒤척였다
먼 훗날 -김소월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의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잊고
먼 훗날 그 때에 '잊었노라'
별꿈을 꾼 밤에는 -김봉석
어머니 무릎을 베고
별꿈을 꾼 밤에는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셀 수 없이 반짝이는
하늘의 친구들 속에
또렷이 박힌
내 자리를 확인하고는
끝도 없는 설렘에
눈 뜰 수 없던 긴긴 밤
어머니 무릎을 베고
별꿈을 꾼 밤에는
밤 하늘을
훨훨 날아가고 싶었다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있으랴
젖지않고 피는 꽃이 어디있으랴
이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었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있으랴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귀천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꿈 -황인숙
가끔 네 꿈을 꾼다
전에는 꿈이라도 꿈인 줄 모르겠더니
이제는 너를 보면
아, 꿈이로구나
알아챈다
풀꽃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낙엽 -유치환
너의 추억을 나는 이렇게 쓸고 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푸시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아라
슬픈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날은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것
모든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것 그리움이 되리니
꽃 -조은
오래 울어본 사람은
체념할 때 터져 나오는
저 슬픔과도 닿을 수 있다
첫사랑 -이운학
그대가 꺾어준 꽃,
시들 때까지 들여다보았네
그대가 남기고 간 시든 꽃
다시 필 때까지
호수 -정지용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감을밖에
이런 시 -이상
내가 그다지 사랑했던 그대여
내 한 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평생 못 올 사람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어여쁘신 그대는 내내 어여쁘소서
하늘의 천 -예이츠
내게 금빛과 은빛으로 짠
하늘의 천이 있다면,
어둠과 빛과 어스름으로 수놓은
파랗고 희뿌옇고 검은 천이 있다면,
그 천을 그대 발 밑에 깔아드리련만
나는 가난하여 가진것이 꿈뿐이라
내 꿈을 그대 발 밑에 깔았습니다
사뿐히 밟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이형기 -낙화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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